한누리역사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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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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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탐방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
왕릉에서 조선왕조의 효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릉은 1392년부터 519년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이끌어온 왕과 비의 무덤을 말합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했답니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 없이 온전히 남아 있는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답니다.자,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겨 볼까요.

  • 탐방일시

    매월 넷째주 토요일09시~18시

  • 탐방대상

    초등~성인(그룹별, 개인 신청)

  • 탐방진행

    종일수업

  • 탐방비용

    매월 성인 55,000원 / 학생 50,000 (차량비, 입장료, 강사료, 점심식사, 여행자보험 등 모든 비용 포함)

  • 만남장소

    강동구 둔촌역 2번 출구

  • 준비사항

    필기도구, 간편한 복장, 약간의 간식 등

  • 참고사항

    탐방신청 후 불참해야 하는 경우에는 견학 10일 전 14시까지 확인된 사항에 한하여 100% 환불가능하며 이후에는 환불 불가능 합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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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동구릉

수업주제 : 세계문화유산인 조선 왕릉의 문화적 가치와 조선 왕릉의 조영 법칙

탐방일정: 1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1392년 조선 건국이래 1910년까지 무려 519년 왕조가 지속되었습니다. 하나의 왕조가 5백 년 이상 지속된 것은 세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유례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 왕릉이라고 합니다.

조선 왕릉은 풍수상 길지를 신중히 택하여 가급적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릉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한 조영 법칙을 유지하였고 단순 유적지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예법과 의례 절차,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은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지며 이 기록물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가 있습니다.
동구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입니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습니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왕릉과 3대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의 묘인 명빈묘가 있습니다.

400여 년에 걸쳐 여러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의 으뜸 명당인 동구릉을 찾아가 그 곳의 기운을 느껴보세요

(위치 : 경기도 구리시)

2월

헌릉, 인릉

수업주제 : 태종과 순조의 업적을 통해 본 조선 초기와 후기의 시대상 비교

탐방일정: 2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입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고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도 개혁하였으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국정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초기의 민생안정을 이룩하였습니다. 아들인 세종의 화려한 업적도 아버지인 태종의 정치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힘이 된 인물입니다.
헌릉은 쌍릉으로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에 따라 왕릉과 왕비릉을 나란히 하여 조성되었습니다.

인릉은 23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으로 왕과 왕비가 한 무덤에 묻혀있는 합장릉입니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23대 순조 ~ 24대 헌종 ~ 25대 철종에 이르는 세도정치기에는 사회가 혼란했습니다.

특히 헌인릉의 아래쪽에는 17,000여 평에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숲은 2005년 서울시에서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습지성 식물이 자라고 오색딱따구리, 꾀꼬리, 박새 등이 출현하는 곳입니다.

조선왕릉은 우리에게 왕실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유산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도심 속에서 한국 전통 숲의 맑은 공기와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쉼터를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숲을 함께 산책해 보세요

(위치 : 서울 서초구)

3월

영릉, 녕릉

수업주제 : 세종대왕의 업적과 호란 이후 조선의 정치, 사회

탐방일정: 3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입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무덤은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입니다.

세종은 31년 6개월의 재위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특히,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습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녕릉(寧陵)은 17대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무덤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동원상하릉)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효종은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으로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귀국 후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효종은 10년간 재위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생산성을 높이고자 노력했습니다. 특히 청나라에 대하여 북벌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수축하였으나 북벌의 기회는 얻지 못하고 재위 10년에 승하하였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 곳에서 올바른 지도자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위치 : 경기 여주군)

4월

광릉

수업주제 : 세조와 정희왕후를 통해서 본 조선 전기의 정치와 사회

탐방일정:4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습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입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습니다.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습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의 차남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6조 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습니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으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습니다.

정희왕후는 남편인 세조가 죽고 어린 아들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고 이후 손자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후 몇 년간, 총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섭정을 했습니다. 광릉 주변에는 잘 보존된 숲이 이루어져 있어서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이 보존되어 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수목원으로만 알려졌을지도 모를 광릉의 진짜 주인을 만나봅시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5월

서오릉

수업주제 : 왕족의 무덤 분류:능(陵) ,원(園), 묘(墓)와 우허제(右虛制)

탐방일정: 5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되는데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분을 일컫습니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입니다.

서오릉은 5기의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오릉 지역이 능 지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1457년(세조 3)에 세자가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의경세자의 경릉이 들어서면서부터 입니다. 서오릉은 추존 왕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왕릉 외에도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무덤인 순창원,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무덤인 수경원,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미니인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 16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의 묘인 영회원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의 모습이 한 쪽 방향으로 치우쳐져 있어 특이한데 여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서오릉에서 함께 들어봅시다.

(위치 : 경기도 고양시)

6월

선릉, 정릉

수업주제 : 유교법치국가의 확립과 사림의 수난

탐방일정: 6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세계적인 대도시의 도심 한복판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는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과 그들의 아들인 11대 중종의 정릉이 있습니다.

선릉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입니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습니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 반포했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습니다.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재위 25년 동안 조선 전기의 문물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왕비 공혜왕후 승하 후 원자(연산군)를 낳은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가 행실을 문제 삼아 폐비 후 사사하였는데, 이는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인 성종대에 성장하기 시작한 세력인 사림은 아들인 중종대에 조광조의 중용과 함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는 듯 했으나 기묘사화로 벼슬진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을 통해 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하다가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중앙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였습니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506년에 연산군의 계속된 폭정에 대항하여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였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화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잘 아는 봉은사는 정릉의 원찰로 원래이름은 견성사, 1498년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된 것입니다.중종의 능은 어느 왕비와도 함께 묻히지 않은 조선시대 몇 안되는 단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중종의 정릉이 단릉형식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유교법치국가의 확립이란 국가운영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도심속에서 숲속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선릉, 정릉에서 알아봅시다.

(위치 : 서울 강남구)

7월

의릉, 정릉, 연산군묘

수업주제 : 각 무덤의 양식 비교를 통한 조선 왕릉의 양식 이해

탐방일정: 7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의릉은 20대 경종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능입니다. 위쪽에 있는 봉분이 경종의 능이고 아래쪽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입니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 우로 나란히 조성하지만 이 능은 앞, 뒤로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으로 이처럼 앞·뒤로 부부의 능을 조성한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입니다. 선천적으로 병약했고 재위4년 만에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였습니다. 후위는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현재 의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연못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1962년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서 넓은 축구장을 조성하고 콘크리트 청사 건물을 세우는가 하면, 좌측 능선 역시 청사를 짓기 위해 산허리를 잘라냈습니다. 1972년경에는 정자각 앞과 홍살문 사이 사초지의 땅을 파서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상어를 기르며, 외래수종 식재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조경시설물들을 설치하였습니다. 2003년 발굴조사 당시 남아 있던 고 건축물로는 정자각과 비각, 홍살문뿐이었으며, 수복방, 수라방, 재실은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이 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정릉은 단릉으로 조성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으로 처음에는 현재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영국대사관 자리에 태조 사후 함께 묻힐 자리까지 마련하여 능역이 조영되었으나, 원비의 태생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태조는 동구릉 내에 묻히고 정릉은 현재의 위치로 천장되었습니다. 태종은 이때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1410년(태종 10)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인해 무너지자 예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들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왕비의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밟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지고,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어집니다. 그 중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정릉의 공간은 일반 왕릉의 영역이 직선축을 이루는 데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능역 입구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터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입니다.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조선 10대 왕입니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정사를 펼치다가 1498년(연산군 4)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 등 많은 신진 사류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켰습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었으며 강화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연산군묘의 시설은 대군으로 예우하여 형식을 갖췄으나 병풍석, 석양, 석마, 사초지, 문석인 등은 세우지 않았습니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음을 왕릉 탐방을 통해 알아볼까요?

( 위치 : 서울 성북구, 서울 도봉구(연산군묘) )

8월

서삼릉

수업주제 : 소현세자의 안타까운 죽음과 세도정치기 사회혼란 / 태실을 통해서 본 생명 존중 사상의 정신

탐방일정: 8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과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이 들어서면서 왕릉군이 된 곳입니다. 이후 주변에 후궁이나 대군, 공주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철종과 그의 부인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이 들어오면서 서삼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 21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장조)의 첫째 아들 의소세손의 묘인 의령원, 22대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이 있습니다.

서삼릉의 경내에는 9대 성종의 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를 비롯한 49묘, 태실 54기가 있습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일명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9세에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철종은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으며 조정을 다스리게 되는데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습니다. 철종은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등 민란의 수습에 진력했으며 1863년(철종 14) 12월 8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첫 아들로 1625년(인조 3)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자빈은 민회빈(愍懷嬪) 강씨입니다. 세자는 정묘호란(1627년) 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 민심을 수습하였고,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637년(인조 15)에 동생 봉림대군(훗날 효종) 및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심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적 재량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1645년(인조 23) 2월에 9년간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으나 당시 조정에서의 반청친명정책으로 인해 박대받았습니다. 그 해 4월 갑자기 병으로 눕게 되어 4일 만에 급사하였는데 『인조실록』에는 시신의 구혈(九血)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낯빛이 진흙으로 변해있었다고 하여 독살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이 앞선 것으로 조선이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왕족의 무덤인 능(陵) ,원(園), 묘(墓)는 각각 다른 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회묘는 다른 ‘묘’와는 격식이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회묘는 어떤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여타의 ‘묘’와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그리고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인 태실을 통해서 왕실의 출산 준비와 우리나라 태실의 역사, 생명 존중 사상의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풍수지리상 길지에 귀중히 모셨던 태실이 현재 어떠한 이유로 서삼릉에 모여있게 되었는지 공부해봅시다.

(위치 : 경기도 고양시)

9월

태릉, 강릉

수업주제 : 임진왜란 전의 조선의 정치와 사회

9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태릉은 11대 중종의 두 번째 부인 문정왕후의 능이고 강릉은 그녀의 아들이자 13대 명종과 부인 인순왕후의 능으로 왕의 무덤 옆에 왕비가 죽은 후 능을 쓴 쌍릉입니다.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낳은 경원대군을 임금의 자리에 올리려는 권력싸움의 중심에서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권이 경원대군의 어머니 문정왕후에게로 넘어왔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모든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형을 포함한 소윤 일파는 대윤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을사사화를 일으켰으며, 그 후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습니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봉은사 주지 보우와 상의하여 지금의 서삼릉의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지금의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으므로,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어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한 금천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습니다.

중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명종이 20세가 되던 해에는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명종은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 등용을 하려 했으나, 당쟁과 파당의 문란한 정치를 막을 길이 없었고 친정이라고 해도, 큰 일은 일일이 문정왕후의 지시를 받아 처리해야 했으므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임꺽정이 활동하던 시기도 명종 재위 시기였으므로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흉년,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에 따른 흉흉한 민심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승하하면, 왕위를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의 결정권은 형식적으로나마 대비에게로 이양됩니다. 대비는 사적으로는 새로 왕이 될 자의 어머니이며, 선왕의 부인입니다. 비록 남편이 죽고 없지만 대비는 국모로서의 권한과 함께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것입니다.

명종과 인순왕후 둘 사이에는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탓에 명종의 뒤를 이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전에 명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덕흥군(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의 아들)의 아들 하성군을 의중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명종의 의중을 알고 있었던 인순왕후는 당시 16세이던 하성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그가 조선의 14대 왕 선조입니다.선조 대의 역사상 큰 사건인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해 공부해보고 임진왜란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위치 : 서울 노원구)

10월

파주 삼릉

수업주제 : 왕족들의 삶과 죽음

탐방일정: 10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의 공릉, 9대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의 순릉, 추존왕 진종과 그의 비가 잠들어 있는 영릉이 파주 삼릉을 이루고 있습니다.

공릉은 장순왕후의 능이지만 그녀가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간략히 조영하였습니다. 후에 왕후로 추존된 후에도 세자빈묘로 조영한 능에 더 이상의 상설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순릉은 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단릉으로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으로 조영되었기에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습니다.공릉의 장순왕후와 순릉의 공혜왕후는 둘 다 한명회의 딸로서 왕실로 출가하였지만, 꽃다운 나이에 둘 다 단명하였습니다.

세조의 지략가였던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명, 딸이 4명 있었는데, 자녀들을 모두 왕가의 며느리로 들여 더욱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맏딸은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하였으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 바로 옆의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가 바로 셋째 딸입니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언니와 동생 사이가 아닌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가 된 것입니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 아들 진종(효장세자)과 비 효순왕후의 능으로 쌍릉으로 조영되었습니다. 진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가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능 또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영조는 40세가 넘어 둘째 아들을 얻자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바로 사도세자입니다. 그러나 영조는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키고, 그의 맏아들인 왕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으며 그가 바로 정조입니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영릉이라 하였습니다.

(위치 : 경기도 파주시)

11월

융릉, 건릉

수업주제 : 붕당정치의 폐단과 조선 후기 계몽군주 정조

탐방일정: 11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융릉은 사도세자로 잘 알려져 있는 추존왕 장조와 그의 부인 경의왕후의 합장릉이고 건릉은 그의 효성스러운 아들 22대 왕 정조의 능입니다.추존왕 장조의 능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억울한 누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재조영하였습니다.

장조는 조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22대 정조의 생부로 1735년(영조 11) 1월 21일 영빈 이씨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효장세자(추존왕 진종)가 요절하였으므로, 2세가 되던 해인 1736년(영조 12) 3월 15일 왕세자에 책봉되고,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 1월 23일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그를 경계하는 노론 및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모함을 하여 영조와 세자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이후 갈등이 깊어지면서 영조의 노여움을 사 폐서인 된 후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숨지게 하였습니다.이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맞던 1795년(정조 19)친정 조카 홍수영의 소청에 의해 사도세자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습니다.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정조는 장헌(사도)세자(훗날 장조로 추존)와 혜경궁 홍씨(훗날 경의왕후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즉위 후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상하였으며,아울러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벽파 일당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습니다.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신분의 제약 없이 능력과 학식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임진자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고,『증보동국문헌비고』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습니다.

이론이 중시되는 학문에 치우치지 않고,실학을 발전시켰으며,조선 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가져왔습니다.가난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제도 개편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의 무덤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는데 있었습니다.,그러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아울러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에 머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며,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각종 문헌에 등장하기도 합니다.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그러나 정조는 1800년(정조 24) 4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남으로써,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정조가 꿈꾸던 이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함께 알아볼까요?

(위치 :경기도 화성시)

12월

홍릉, 유릉

수업주제 :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와 구한말 시련의 역사 속 고종과 순종의 노력

탐방일정: 12월 4째 주 토요일 9시~18시

홍유릉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조성된 26대 고종 부부와 27대 순종 부부가 잠들어있는 황제릉으로 명나라 태조 효릉의 능 제도를 본떠 만들어 이전의 왕릉에서의 형식과 상설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습니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고종은 1852년(철종3)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으며,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케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치세 아래 있던 고종은 장성하면서 친정의 의욕을 내비쳐 아버지와 대립하다가 1873년(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외척인 민씨 일가의 권력이 강해졌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습니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을미사변 등 큰 사건들을 뒤로 하고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그들의 강요로 인해 그해 7월 양위조서를 내리고 순종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었습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승하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순종은 1874년(고종 11)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7월 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융희 1) 7월 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융희 4)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는 유언을 남기고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 황제 유언이 헛되지 않았던걸까요 황제의 장례일인 6월 10일,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벌써 잊혀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면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았던 역사입니다. 이제 500년 넘는 왕조의 끝은 어떠했는지 황제가 잠들어있는 곳으로 떠나볼까요?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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